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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투리아 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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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민회로, 로마 왕정 시대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로마 군을 재산에 따라 6개 계급으로 나누고, 이를 193개의 켄투리아로 세분한 것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켄투리아는 투표 단위로 집정관, 법무관 선출, 재판, 전쟁 등 중요 사항을 결정했으며,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된 형태였다.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시 외곽의 캄푸스 마르티우스에서 개최되었으며, 투표권은 각 켄투리아에 하나씩 주어졌다. 공화정 후기에는 법안 제정 기능을 상실하고 공직 투표를 실시하는 기관으로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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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투리아 민회
개요
종류로마 공화정의 민회
역할최고위 공직자 선출, 전쟁 선포, 사형 선고 재판
구성원로마 시민 (군 복무 가능 연령의 남성)
의결 단위켄투리아 (centuria, 백인대)
명칭
라틴어 명칭Comitia Centuriata (코미티아 켄투리아타)
한국어 명칭켄투리아 민회 (일반적인 번역), 백인대회 (직역)
역사
기원로마 왕정 시대의 군사 조직
설립 시기기원전 450년경 (전통적인 견해), 기원전 241년 이후 (현대적인 견해)
주요 변화세르비우스 툴리우스 개혁 (계급별 켄투리아 편성)
기원전 241년 이후의 개혁 (투표 순서 및 방식 변경)
소멸 시기로마 제정 초기 (실질적인 기능 상실)
구성 및 조직
켄투리아 수총 193개 (기원전 241년 이후)
계급별 구성제1계급: 80개 켄투리아
제2~4계급: 각 20개 켄투리아
제5계급: 30개 켄투리아
기병: 18개 켄투리아
기술자 및 악사: 2개 켄투리아
투표 방식각 켄투리아별 투표 후 다수결
상위 계급부터 투표, 과반수 달성 시 투표 종료
권한 및 기능
주요 기능최고위 공직자 (콘술, 프라이토르, 감찰관) 선출
전쟁 선포 및 강화 조약 비준
사형 선고에 대한 재판 (시민의 권리 보호)
법률 제정 (초기에는 제한적)
제약 사항원로원의 사전 동의 필요 (법률 및 전쟁 관련)
트리부스 민회의 견제 (평민의 권익 보호)
평가
특징재산에 따른 계급별 차등 투표권 (부유층 우대)
군사 조직의 성격 반영 (전쟁 수행 능력 중시)
로마 공화정의 핵심적인 정치 기구
한계평민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함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 제한
내전 시기 권위 약화
참고 자료
관련 서적Mommsen, Römisches Staatsrecht (뫼름젠, 로마 공법)
Lintott, The Constitution of the Roman Republic (린토트, 로마 공화정 헌법)
관련 링크

2. 역사

켄투리아 민회는 초기 로마의 정치, 군사 제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 왕정 시대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시민들을 재산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이를 군사 조직인 켄투리아로 편성한 것이 켄투리아 민회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켄투리아 민회는 집정관, 법무관 등 주요 공직자를 선출하고, 전쟁 선포와 같은 중요한 국가적 사안을 결정하는 투표를 진행했다. 이러한 군사 조직과 정치 조직의 결합은 로마 시민 공동체가 중장보병 중심의 군사적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각 켄투리아는 '백인대'를 의미하지만, 반드시 100명으로 구성될 필요는 없었다. 재산에 따른 계급 구분이 우선되었고, 각 켄투리아는 계급별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투표권은 각 켄투리아에 주어졌으며, 켄투리아 내 다수결로 의사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부유층이 더 많은 켄투리아를 차지했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의 의견은 반영되기 어려웠다.

원래 군사 조직이었던 켄투리아 민회는 포메리움이라는 성벽 안에서 열릴 수 없었다. 따라서 캄푸스 마르티우스라는 로마 외곽 지역에서 개최되었다. 시간이 흘러 로마가 확장되면서 캄푸스 마르티우스가 사실상 시내에 포함되었지만, 민회는 계속 그곳에서 열렸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켄투리아 민회는 입법 기능을 상실하고, 쿠르수스 호노룸이라 불리는 명예 공직 선거를 위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2. 1. 기원과 발전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로마 왕정 시대에 제6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로마 군을 구성하는 모든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그 계급별로 세분하여 총 193개의 '켄투리아'로 나눈 것에서 기원한다고 한다.[26]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각 켄투리아는 투표 단위였으며,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을 토의했다.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된 형태는 로마 시민 공동체가 전쟁을 통한 중장보병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켄투리아'는 '백'을 의미하지만, 100명 정원을 채우는 것보다 재산에 따른 6개 계급 구분이 우선되었고, 각 켄투리아는 계급별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켄투리아 민회는 원래 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 열릴 수 없었고, 로마 지역의 캄푸스 마루티우스(마르스 신의 땅)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로마의 거주 범위가 넓어져, 캄푸스 마루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었지만 계속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투표권은 시민 개인이 아닌 켄투리아 단위에 주어졌다. 각 켄투리아의 투표 의사는 다수결로 정해졌지만,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급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27]

2. 2. 켄투리아 민회의 변천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왕정 시대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로마군을 구성하는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 계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193개의 '켄투리아'로 편성한 것에서 기원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하여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 재판, 전쟁 등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된 형태는 로마 시민 공동체가 전쟁을 통한 호플리테스(중장보병) 공동체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각 켄투리아는 '백인대'라는 의미와 달리 반드시 100명으로 구성될 필요는 없었고, 재산에 따른 계급 구분이 우선되어 각 켄투리아에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성벽 안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군사 조직에 기반한 켄투리아 민회는 시내가 아닌 캄푸스 마루티우스(Campus Martius, 마르스의 땅)에서 개최되었다. 시간이 흘러 로마 거주지가 확장되어 캄푸스 마루티우스가 사실상 시내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민회가 열렸다.

투표권은 시민 개인이 아닌 각 켄투리아에 부여되었고, 각 켄투리아 내 다수 의견이 해당 켄투리아의 투표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193개 켄투리아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으로 구성되어 가난한 계급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켄투리아 민회는 법안 제정 기능을 상실하고, 쿠르수스 호노룸이라는 명예로운 공직 선거를 위한 기관으로 축소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직접 민주주의 체제에서 입법, 선거, 사법 관련 사항에 대한 투표는 두 가지 주요 유형의 민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위원회(''comitia'')였다. 켄투리아 민회는 위원회였다. 위원회는 ''모든 시민''의 민회였으며, 법률 제정 등 공식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위원회의 결정은 해당 위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적용되었다. 두 번째 유형의 민회는 평의회(''concilium'')였으며, 이는 시민의 ''특정 집단''이 공식적인 목적으로 모이는 포럼이었다.[3] 반면에, '''집회'''(''conventio'')는 비공식적인 의사 소통을 위한 포럼이었다. 집회는 로마인들이 정치 연설을 듣는 것과 같이 특정 비공식적인 목적으로 모이는 포럼이었다.[4] 정치 관직을 맡지 않은 일반 시민은 위원회나 평의회가 아닌 집회에서만 발언할 수 있었다.[5] 집회는 단순한 회의였으며, 법적 또는 입법적 결정은 집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다. 투표자들은 항상 먼저 집회에 모여 토론을 듣고 다른 업무를 처리한 다음, 위원회 또는 평의회에 모여 실제 투표를 진행했다.

민회가 실제 투표를 하기 며칠 전에 항상 공지가 이루어져야 했다. 선거의 경우, 선거 발표와 실제 선거 사이에 최소 3일(실제로는 17일 이상인 경우가 많음)의 시장일이 지나야 했다. 이 기간(''trinundinum'') 동안 후보자들은 유권자들과 교류했으며, 어떠한 법안도 제안되거나 투표될 수 없었다. 기원전 98년에는 법률 제안과 해당 법률에 대한 투표 사이에 유사한 3일의 시장일 간격을 요구하는 법(''lex Caecilia Didia'')이 통과되었다. 형사 재판 동안, 민회의 주재 행정관은 조사 첫날(''anquisito'') 피고인에게 통지(''diem dicere'')를 해야 했다. 매일 마지막에 행정관은 피고인에게 조사 상황을 알리는 또 다른 통지(''diem prodicere'')를 해야 했다. 조사가 완료된 후, 유죄 또는 무죄에 대한 최종 투표가 이루어지기 전에 3일의 시장일 간격이 지나야 했다.[6]

한 번에 하나의 민회만 운영될 수 있었고, 이미 진행 중인 회의는 행정관이 유권자를 "소환"(''avocare'')하면 해산될 수 있었다.[7] 주재 행정관 외에도, 여러 명의 추가 행정관이 보조 역할을 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절차상의 분쟁을 해결하고, 유권자들이 주재 행정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또한 아우구르라고 알려진 종교 관료들이 참석하거나 대기하여, 로마인들이 신들이 제안된 행동에 대한 승인 또는 거부를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의 징조(조짐)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또한, 주재 행정관은 회의 전날 밤에 조짐(''auspices'')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실시했다.[9] 알려진 몇몇 경우, 주재 행정관들은 불리한 조짐을 핑계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 회의를 중단했다. 기원전 162년, 주재 행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조짐을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의 집정관 선거를 취소하기까지 했다. 집정관들은 사임해야 했고 새로운 선거가 조직되었다.[10][11]

투표 당일, 유권자들은 먼저 토론과 선거 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집회''에 모였다. 집회에서 유권자들은 각 켄투리아로 분류되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의 연설은 투표할 문제가 입법 또는 사법 문제인 경우에만 허용되었으며, 심지어 그 경우에도 시민이 주재 행정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12] 최종 투표의 목적이 선거인 경우, 일반 시민의 연설은 허용되지 않았고, 대신 관직 후보자들이 선거 운동을 위해 집회를 이용했다.[13] 집회 동안, 투표할 법안은 "전령관"이라고 알려진 관리가 민회에 낭독했다. 평민 트리뷴은 이 시점까지 계류 중인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할 수 없었다.[14]

그 후 유권자들은 집회를 해산하고("너희는 각자의 그룹으로 흩어져라", 또는 ''discedite, quirites'') 공식 켄투리아에 모이도록 지시받았다. 유권자들은 울타리가 쳐진 구역 뒤에 모여[15] 적절한 항아리에 조약돌이나 서면 투표지를 넣는 방식으로 투표했다.[16] 투표를 담는 바구니(''cistae'')는 특정 관리(''custodes'')가 감시했으며, 그들은 투표 용지를 집계한 후 결과를 주재 행정관에게 보고했다. 어떤 켄투리아에서든 과반수의 투표가 해당 켄투리아의 투표 방식을 결정했다.[17] 날이 저물도록 이 절차가 완료되지 않으면, 유권자들은 결정 없이 해산되었고, 절차는 다음 날 다시 시작해야 했다.[18]

켄투리아 민회는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국 건국보다 1세기 전 전설적인 로마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켄투리아 민회의 원래 설계는 "세르비우스 조직"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 하에서, 민회는 로마 왕국 시대의 로마 군대를 모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시민-병사들이 집정관과 법무관을 선출하고, 따라서 그들의 지도자를 선출할 책임을 갖도록 분할되었다.

로마 군대는 현대 군대의 중대에 비유되는 백인대라는 부대를 기반으로 했다. 로마 군대의 백인대는 항상 약 1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지만, 켄투리아 민회의 백인대는 대개 그렇지 않았다. 이는 투표 백인대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재산 자격 요건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지 않은 반면, 군사 백인대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재산 자격 요건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군대의 병사들은 소유한 재산의 양을 기준으로 분류되었으며,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병사는 더 적은 재산을 가진 병사보다 계급이 높았다. 부유한 병사들은 초기 로마 군대에서 더 많은 백인대로 나뉘었고, 더 큰 군사적 부담을 가졌기 때문에, 켄투리아 민회에서도 더 많은 백인대로 나뉘었다. 따라서 수가 적고 잃을 것이 더 많은 부유한 병사들은 전체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원래의 세르비우스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계급재산켄투리아비고
기병-18
제1 클라시스10만 아스 이상노년(47세 이상) 40, 청년(17~47세) 40
제2 클라시스7만 5천~10만 아스20
제3 클라시스5만~7만 5천 아스20
제4 클라시스2만 5천~5만 아스20
제5 클라시스1만 1천~2만 5천 아스33
그 이하(병역 면제)1[27]



투표는 계급 순서대로 진행되었으며, 상위 계급이 먼저 투표했다. 과반수를 얻으면 투표가 종료되었으므로 하위 계급은 투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기원전 241년에서 216년 사이에 켄투리아가 재분배되었다. 총 켄투리아 수는 193개에서 373개로 증가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35개 부족이 각각 10개의 켄투리아로 나뉘었다.[24] 각 부족은 노년병 5개, 청년병 5개 켄투리아로 구성되었다. 이 5개의 켄투리아 각각은 5개의 재산 계급 중 하나에 할당되었다. 따라서 각 부족은 5개의 재산 계급 각각에 2개의 켄투리아(노년병 1개, 청년병 1개)를 할당받았다. 또한, 5개 계급 각각에 대한 재산 요건이 상향 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 350개의 켄투리아가 징집된 병사로 구성되었다. 장교 18 켄투리아와 무장하지 않은 병사 5 켄투리아도 이 개편에 포함되었다.[25] 이 개편으로 징집된 병사 켄투리아의 세 번째 계급이 투표를 시작할 때까지는 일반적으로 과반수를 확보할 수 없었다.

thumb, 민회의 권력을 바꾸려 시도함]]

기원전 82년부터 80년까지 독재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켄투리아 민회에 이전의 세르비우스 조직을 복원했다. 이는 귀족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술라 사후 기원전 70년에 집정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술라의 개혁을 폐지하고 기원전 241년의 덜 귀족적인 조직으로 복원했다.

2. 3. 공화정 말기의 쇠퇴

공화정 후기가 되면서, 켄투리아 민회는 법안을 만드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고, 쿠르수스 호노룸이라는 승진을 위한 공직 투표를 실시하는 기관 정도로 위상이 축소되었다.

3. 구성 및 운영 방식

켄투리아 민회는 초기에는 군사 조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치적 기능을 강화해 나갔다.

로마 왕정 시대에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로마 군을 구성하는 모든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총 193개의 '켄투리아'로 세분한 것에서 켄투리아 민회가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가 이루어졌으며,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이 토의되었다.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된 형태였기에, 로마 시민 공동체는 호플리테스(중장보병)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하나의 켄투리아는 ‘백’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100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산에 따른 6개 계급 구분이 우선되었고, 각 켄투리아는 계급 내에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전통적으로 금지되었다. 켄투리아 민회는 본래 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 열릴 수 없었고, 로마 지역의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의 땅)라는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로마의 거주 범위가 확산되었고, 캄푸스 마르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었음에도 이곳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투표권은 시민 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하나의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각 켄투리아의 투표 의사는 그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었고, 계급으로 나뉜 켄투리아는 해당 계급 다수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러나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급의 의견이 민회에서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켄투리아 민회는 예전과 같은 법안을 만드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고, 야심 있는 사람이 쿠르수스 호노룸이라는 승진을 위한 공직 투표를 하는 기관 정도로 위상이 축소되었다.

켄투리아 민회는 단순한 정치적 모임을 넘어, 종교적인 신성함이 부여된 공간이었다. 회의 전날 밤, 주재 행정관은 신의 뜻을 묻는 의식인 조짐(auspices)을 살폈으며,[9] 아우구르라고 불리는 종교 관료들은 신들이 제안된 행동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지를 나타내는 징조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때때로 주재 행정관은 불리한 징조를 이유로 회의를 중단하기도 했다.[9]

3. 1. 투표 단위: 켄투리아

로마 왕정 시대에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로마 군을 구성하는 모든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총 193개의 '켄투리아'로 세분한 것에서 기원한다고 전해진다.[26]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하여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한 재판, 전쟁 등 국가 중대사를 결정했다. 군사 조직과 정치 운영이 결합된 형태는 로마 시민 공동체가 중장보병 공동체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켄투리아'는 '백인대'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100명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재산에 따른 계급 구분이 우선시되어 각 켄투리아에 인원이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본래 군사 조직이었던 켄투리아 민회는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안에서 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로마 시외의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 신의 땅)에서 개최되었는데, 로마의 영역이 확장되어 캄푸스 마르티우스가 사실상 시내에 포함된 후에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투표권은 시민 개인이 아닌 각 켄투리아에 부여되었다. 각 켄투리아의 투표 의사는 그 구성원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지만,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으로 구성되어 가난한 계급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로마 공화정 후기에 켄투리아 민회는 입법 기능은 거의 상실하고, 쿠르수스 호노룸을 위한 공직 선거 기관 정도로 위상이 축소되었다.

켄투리아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27]

구분내용
기병18 켄투리아
제1 클라시스재산 10만 아스 이상, 노년(47세 이상) 40 켄투리아, 청년(17~47세) 40 켄투리아
제2 클라시스재산 7만 5천~10만 아스, 20 켄투리아
제3 클라시스재산 5만~7만 5천 아스, 20 켄투리아
제4 클라시스재산 2만 5천~5만 아스, 20 켄투리아
제5 클라시스재산 1만 1천~2만 5천 아스, 30+3 켄투리아
그 이하(병역 면제)1 켄투리아


3. 2. 소집과 의장

켄투리아 민회는 군사 조직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로마 시내에서 열리는 것이 금지되었다.[3]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예로부터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켄투리아 민회는 로마 지역의 캄푸스 마루티우스(Campus Martius, 마르스의 땅)에서 개최되었다.[3]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로마의 거주지 범위가 확산되었고, 캄푸스 마루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면서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켄투리아 민회의 의장은 일반적으로 집정관이 맡았지만, 프라이토르가 맡기도 했다. 오직 집정관(모든 로마 행정관 중 최고위)만이 선거 기간 동안 켄투리아 민회를 주재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더 높은 계급의 집정관은 항상 더 낮은 계급의 프라이토르와 함께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집정관은 특별한 의자("쿠루스 의자")에 앉았고, 보라색 가장자리가 있는 토가를 입었으며, 릭토르라고 불리는 경호원들을 동반했다. 각 릭토르는 국가 권력의 상징인 파스케스를 들고 다녔는데, 이는 흰 자작나무 막대 묶음을 붉은 가죽 끈으로 원통형으로 묶은 것이었고, 도시 밖에서는 묶음 옆에 칼날이 튀어나와 있었다.

민회가 실제 투표를 하기 며칠 전에는 항상 공지가 이루어져야 했다.[6] 선거의 경우, 선거 발표와 실제 선거 사이에 최소 3일(실제로는 17일 이상인 경우가 많음)의 시장일이 지나야 했다.[6] 기원전 98년에는 법률 제안과 해당 법률에 대한 투표 사이에 유사한 3일의 시장일 간격을 요구하는 법(''lex Caecilia Didia'')이 통과되었다.

한 번에 하나의 민회만 운영될 수 있었고, 이미 진행 중인 회의는 행정관이 유권자를 "소환"(''avocare'')하면 해산될 수 있었다.[7] 주재 행정관 외에도, 여러 명의 추가 행정관이 보조 역할을 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절차상의 분쟁을 해결하고, 유권자들이 주재 행정관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또한 아우구르라고 알려진 종교 관료들이 참석하거나 대기하여, 로마인들이 신들이 제안된 행동에 대한 승인 또는 거부를 나타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의 징조(조짐)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주재 행정관은 회의 전날 밤에 조짐(''auspices'')에 대한 예비 조사를 실시했다.[9] 알려진 몇몇 경우, 주재 행정관들은 불리한 조짐을 핑계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는 회의를 중단하기도 했다.[9]

3. 3. 투표 절차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로마 왕정 시대에 제6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로마 군을 구성하는 모든 시민을 재산에 따라 6개의 계급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총 193개의 ‘켄투리아’로 세분한 것에서 켄투리아 민회가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원전 5세기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가 이루어졌으며,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이 토의되었다.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된 형태였기에, 로마 시민 공동체는 전쟁을 통한 호플리테스(중장보병)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하나의 켄투리아는 ‘백’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100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재산에 따른 6개 계급 구분이 우선되었고, 각 켄투리아는 계급 내에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군대가 포메리움이라는 로마 성벽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전통적으로 금지되었다. 켄투리아 민회는 본래 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시내에서 열릴 수 없었고, 로마 지역의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 마르스의 땅)라는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로마의 거주 범위가 확산되었고, 캄푸스 마르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었음에도 이곳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투표권은 시민 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하나의 투표권이 부여되었다. 각 켄투리아의 투표 의사는 그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었고, 계급으로 나뉜 켄투리아는 해당 계급 다수의 의견을 반영했다. 그러나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 부유층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난한 계급의 의견이 민회에서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17]

민회가 실제 투표를 하기 며칠 전에는 항상 공지가 이루어져야 했다. 선거의 경우, 선거 발표와 실제 선거 사이에 최소 3일 (실제로는 17일 이상인 경우가 많음)의 시장일이 지나야 했다. 이 기간(''trinundinum'') 동안 후보자들은 유권자들과 교류했으며, 어떠한 법안도 제안되거나 투표될 수 없었다. 기원전 98년에는 법률 제안과 해당 법률에 대한 투표 사이에 유사한 3일의 시장일 간격을 요구하는 법(''lex Caecilia Didia'')이 통과되었다.

투표 당일, 유권자들은 먼저 토론과 선거 운동을 위해 자신들의 ''집회''(''conventio'')에 모였다. 집회에서 유권자들은 각 켄투리아별로 분류되지 않았다. 일반 시민들의 연설은 투표할 문제가 입법 또는 사법 문제인 경우에만 허용되었으며, 그 경우에도 시민이 주재 행정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최종 투표의 목적이 선거인 경우, 일반 시민의 연설은 허용되지 않았고, 대신 관직 후보자들이 선거 운동을 위해 집회를 이용했다.[13] 집회 동안, 투표할 법안은 "전령관"이라고 알려진 관리가 민회에 낭독했다. 평민 호민관은 이 시점까지 계류 중인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할 수 없었다.[14]

그 후 유권자들은 집회를 해산하고("너희는 각자의 그룹으로 흩어져라", 또는 ''discedite, quirites'') 공식 켄투리아에 모이도록 지시받았다. 유권자들은 울타리가 쳐진 구역 뒤에 모여[15] 적절한 항아리에 조약돌이나 서면 투표지를 넣는 방식으로 투표했다.[16] 투표를 담는 바구니(''cistae'')는 특정 관리(''custodes'')가 감시했으며, 그들은 투표 용지를 집계한 후 결과를 주재 행정관에게 보고했다.

3. 4. 종교적 요소

켄투리아 민회는 종교적인 요소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회의 전날 밤, 주재 행정관은 신의 뜻을 묻는 의식인 조짐(auspices)을 살폈다.[9] 아우구르라고 불리는 종교 관료들은 신들이 제안된 행동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지를 나타내는 징조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

때때로 주재 행정관은 불리한 징조를 이유로 회의를 중단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62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조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는 이유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피굴루스의 집정관 선거를 취소했다.[10][11] 이처럼 켄투리아 민회는 단순한 정치적 모임이 아니라, 종교적 신성함이 부여된 공간이었다.

4. 역할과 권한

기원전 5세기 무렵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켄투리아 민회는 각 켄투리아 단위로 투표하여 집정관, 법무관 선출, 중요한 재판, 전쟁 등 시정의 중요 사항을 결정했다.[26] 군사 조직과 시정 운영이 결합되어 로마 시민 공동체가 중장보병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켄투리아는 '백'이라는 의미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100명으로 구성될 필요는 없었으며, 재산에 따라 나뉜 6개의 계급 구분이 우선시되어 각 켄투리아로 균등하게 배분되었다.[26]

켄투리아 민회는 본래 군사 조직이었기 때문에, 군대가 포메리움이라고 불리는 로마 성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던 로마에서는 시내에서 민회를 열 수 없었다. 대신 로마 시외의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 신의 땅)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며 로마의 거주 범위가 넓어져 캄푸스 마르티우스가 실질적으로 로마 시내가 되었음에도 이곳에서 개최되었다.[26]

투표권은 시민 각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켄투리아에 하나의 투표권이 있었다. 각 켄투리아의 투표 의사는 그 켄투리아에 맡겨졌고, 계급으로 나뉜 켄투리아는 그 계급의 대다수 의견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193개 중 98개가 귀족 등의 부유층으로 구성되어, 가난한 계급의 의견이 민회에서 반영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26]

로마 공화정 후기에 켄투리아 민회는 법안을 만드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하고, 쿠르수스 호노룸을 위한 공직 투표를 실시하는 기관 정도로 위상이 축소되었다.[26]

참조

[1] 서적 Abbott
[2] 서적 Taylor
[3] 서적 Abbott
[4] 서적 Lintott
[5] 서적 Abbott
[6] 서적 Lintott
[7] 서적 Lintott
[8] 서적 Taylor
[9] 서적 Taylor
[10] 서적 Plutarch, Marcellus
[11] 서적 Broughton
[12] 서적 Lintott
[13] 서적 Taylor
[14] 서적 Lintott
[15] 서적 Taylor
[16] 서적 Lintott
[17] 서적 Taylor
[18] 서적 Lintott
[19] 서적 Taylor
[20] 서적 Taylor
[21] 서적 Taylor
[22] 서적 Abbott
[23] 서적 The beginnings of Rome: Italy and Rome from the Bronze Age to the Punic Wars (c. 1000 – 264 BC) Routledge 1995
[24] 서적 Abbott
[25] 서적 Abbott
[26] 문서 Centuria、「百」を意味する語で、ローマにおける部隊の単位。「百人隊」などと訳出され、ここでは政治組織としての役割を帯びているが、のちには純粋な軍事単位[[ケントゥリア]]となる。
[27] 서적 로마 건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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